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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루 이야기

아시여, 부디 인도하소서.

審神者物語 - 壹, 日本 神奈川県

 

한국에서 수많은 삿된 것들의 사라져가던 감정을 되찾게 해주고, 그들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일도 여러 번 반복되었을 때였다. 점점 몸이 아닌 정신이 지쳐갔다. 나는 왜 여기에 옛 기억을 가지고 이방인처럼 있는가. 나를 이 시간대에 고정해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지역 자체에 얽매인 지박령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저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건 살아있는 육신이 있다는 것일까.

 

그럼 육신이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박령이 아니라는 하나의 증명이기도 하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본에 이리 도착한 것은 그런 이유고, 공항부터 보이던 삿된 것들을 굳이 아는 체하지 않고 이 집으로 바로 직진해 온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내가 아는 척해주지 않아도 나를 피하기 바빴다. 아직 강렬한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누가 자신의 존재를 꿰뚫어 보고 성불시키는 존재를 달가워하겠는가. 지친 자들이라면 반기겠지만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자들이 더 많았다.

 

살아있다면 쉴 줄도 알아야겠지. 나는 간단히 집에 가기 전에 장을 보았다. 정확히 나의 지금 상태는… 우울했다. 죽었던 자신이 알 법한 사람도 없었고, 살아있던 나 또한 마찬가지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았기에 뭘 하든 힘들어하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외할머니 집은 기억과 변함이 없었다. 근처에 풀숲도 많고 마을 외진 곳에 있어서 자신의 부모님은 이곳을 조금 꺼렸다. 오래된 목조 주택에, 집을 여러 번 개축했다지만 외가 가족인 다섯 명이 살기에는 좁은 곳이었다. 이정도 크기면, 한두 명 살면 딱 맞을 저택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집 뒤에는 숲도 많으니 벌레도 많이 들어왔겠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그 사이 외삼촌이 출퇴근도 좋겠다 여러모로 살려고 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보고 집을 떠넘기는 태도를 보였다. 자세한 건 물어보지 말고 세금 문제라면 자기랑 아는 사람을 연결해서 해결해준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모르겠다.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놨다고 해서 우편함을 달그락거렸다. 온갖 고지서와 모르는 우편이 한 더미가 내 손에 남았다. 안 그래도 귀신의 집 같은데 이런 식으로 해두면 도둑 든다고. 며칠 내로 한국식 전자락 시스템으로 바꿔놓던가 해야겠다. 나는 이 고요한 집 안에 들어가 불을 켰다.

 

“하….”

 

다행히 불은 들어온다. 외삼촌은 그렇게 말해두고는 전기세는 꼬박꼬박 내고는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내부에 먼지가 빼곡하다는 거다. 아무리 몸에 힘이 없다고 해도, 청소하지 않고는 도저히… 도저히 못 쉬겠다! 비행기를 몸을 맡기고 온 피곤함을 떨칠 시간도 없이 나는 들어가자마자 일단 머물 거실과 부엌이라도 청소를 시작했다.

 

하긴, 인터넷 등지 따위에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청소를 하는 것이 잡념을 버리기에는 좋다고 했다. 그래, 청소 등의 고된 일을 하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낫겠지.

 

내부에 뭐가 있는지 쭉 둘러보았다. 진공청소기도 있고, 먼지떨이, TV도 나온 지 몇 년 되지 않는 제품 같았고, 깔끔했다. 외삼촌도 머물 시도는 해본 것 같았다. 수도도 가스도 잘 나오는 걸 보니 숙식에는 문제가 없겠군. 이불은 내일 빨아서 널고, 일단 오늘은 이불빨래는 무리니까 벌레 약을 붙이고, 먼지 좀 털고 닦고 청소기 돌리고… … ….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다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슬슬 배가 고파서 부엌을 뒤져보니 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즉석식품이 꽤 남아있었다. 덕분에 배는 채우겠지만, 도대체 외삼촌은 잘 살다가 뭔 일을 겪은 거야? 의문투성이일 정도로 낡은 집과 먼지 외에는 깨끗하고 좋았다.

 

“세탁기도 제대로 작동하고.”

 

덜커덩 소리를 내긴 하지만 드럼세탁기는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아주 잘 작동해서, 더러워진 옷가지를 세탁기 안으로 쑥 넣어 바라보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빨래, 그리고 그 앞의 나. 앞으로 어떻게 살까.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고 이 우울감을 떨쳐낼 수 있을까?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빨래를 보며 그 안에 엎어지고 넘어지는 내가 보였다.

사실 이곳으로 오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하긴 어딜 나가지 못하고 내내 청소만 했으니 그런가. 자리를 이동해 싱크대를 보니 지워지지 않는 싱크대 얼룩이 보이자 짜증이 났다. 이것까지만 청소하고 밥을 먹자. 몸에 힘을 주며 싱크대를 빡빡 때리듯이 긁어내듯이 닦았다.

 

[띵-동]

“네, 네”

 

그리 청소에 집중하고 있자니, 초인종 소리가 부엌까지 들렸다. 엄청 촌스럽고 정겨운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여기, 초인종도 안 바꾼 모양이다. 나는 손을 닦고 부엌에서 현관문으로 걸어나갔다.

문을 열기 직전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삼촌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던가? 슬쩍 현관문을 열며 조심스레 얼굴을 내미니, 당황하는 표정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나이는 중고생쯤 되어 보이는 애였는데, 키는 나와 엇비슷했다. 머리색은 염색으로 옅은 색이었고 꽤 꾸며서 다니는 것 같은 여자애였다. 외할머니 집과는 안 어울리는 아이 같은데, 여기는 무슨 일이지? 혹시 외삼촌이?!

 

“죄송하지만 외삼촌은 이제 여기 안 살아서요.”

“아니… 저기, 여기 팔렸나요? _복순 가족분은…”

 

외할머니 지인인가? 하지만 전달받은 적은 없는데.

 

“아, 제가 손녀딸이에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늦은 시간이라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저어 저는 근처 마츠모토 가인데요. _복순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서 의뢰받으신 일이 있어서요.”

“음? 네.”

“그… 봉인이나 제령 때문에.”

 

생각해보니 외할머니 집에 안 온 이유가 더 있었구나. 부모님은 생전에 저런 걸 질색했다.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영향이었던 모양이다.

 

“외할머니가 한 봉인이나 제령이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다. 오늘은 해가 졌으니까 내일 다시 오세요. 죄송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저도 피곤해서요.”

“아…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나한텐 그것도 문제가 아니다. 난 지금 피곤한 몸으로 이리저리 청소하고 밥 먹을 시간이었다. 몸에 기운이 없는데 제령을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지금은 해가 져서 굳이 따지자면 요괴들이나 귀신들의 힘이 더 압도적일 것이다. 내가 피곤한 어투로 그리 말하고 문을 닫자, 바깥에서 여자아이의 혼잣말이 더 들리는 듯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신경 쓸 정신도 없기도 하고.

 

나는 렌지에 돌린 햇반을 뜯어 간편식과 간단히 한 끼를 때웠고,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입욕제를 풀었다.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이 될까 사 온 물건인데 욕실에 퍼지는 향도, 욕조에 퍼지는 색도 반짝이는 게 맘에 든다. 아주 오랜만에 녹진한 몸을 따뜻한 욕조에 담갔다. 우울과 피로는 수용성이라던데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되자 집 안에 뭐가 있는 듯, 잡요괴들이 돌아다녀 손짓 하나로 애들을 쓸었다. 일일이 상대하기 힘들었고 슬슬 졸린 게 몸을 눕히고 싶었다.

 

[여기서 잔다고?]

[미친 인간 아닌가?]

[바보 같은 놈들. 난 나가련다.]

“그래, 그래.”

 

거실에 발 뻗고 자기 위해 손으로 요괴를 내쫓는 시늉을 했고, 그 시늉이 헛되지 않은 듯 힘이 없는 애들은 바람에 쓸려 바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신 오지 말렴.”

[미친 인간.]

[무서워….]

 

더는 흘러간 시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단지 쉬고 싶었다. 먼저 살던 이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불을 깔고 담요를 덮어 발을 뻗어 누웠다. 그렇게 눈을 감자마자 머리맡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손녀딸이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그럼 안심이야. 이 애가 쫓아내 줄 거야.]

 

뭐를? 이라고 묻기도 전에 피곤했던 몸과 정신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심지어 꿈까지 꿨다. 어린 내가 외할머니 근처에서 노는 꿈이었다. 어린 나는 할머니 곁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지 옆에서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았고, 위험한 요괴들 같은 것이 내게 다가오자 할머니가 부리나케 내 위험을 감지하고 뛰어왔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생후 몇 개월도 안 된 내가 그 요괴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는데, 그대로 그 요괴를… 말 그대로 종이 찢듯이 없애버렸다. 이렇게 보니 좀 섬뜩할 만도 한데, 할머니는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어린 자신을 안으며 말했다.

 

[우리 ___은 할미 닮았구나.]

[아웅 야]

[큰일 났네. 할미 닮아서… 앞으로 힘들 터인데. 그래도 할미는 안심이구나. 할미가 못하고 가는 걸 ___이가 해줄 것 같아서….]

 

옹알이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에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

 

 

 

다음날이었다. 이놈의 시차가 적응되지 않아 햇빛이 들어오는 5시에 깨버렸다. 하필 거실의 커튼이 두껍지 않아서 햇빛이 안면에 바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피곤하긴 하다만, 일단 당장 일어나서 씻고 아침밥을 먹었다. 오늘은 이불빨래 할 거니까 조금 든든하게 먹어야겠어. 혼자 밥을 먹으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니 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이다. 기운 넣고 후딱 이불을 밟자. 어제의 욕조에 이불 몇 개를 담고 콱콱 밟았다.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 무거운 솜이불을 마당에 널어놓고 거실에 널브러지고 나니, 어제는 못 느꼈던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느껴지는 이 불결하고 재수 없는 기운은 저주의 형태를 한 것 같았다. 이걸 왜 저주사도 아닌 할머니 집에서 느껴지는 건지. 어제 하루는 청소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집안 관리는 확실히 해야 하니 어디에 뭘 넣어 놓아놓았는지 족족 숨겨진 벽장문을 열기 시작했다. 거실 부엌, 안방… 이렇게 확확 걷어붙여서 열고 나니 각각 벽장 안에 특이한 물건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누가 봐도 저주의 기운이 넘실거렸으며, 할머니가 쓴 붉은색 글자로 덕지덕지 종이가 붙어있었다. 하여간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라니까. 물론 가야의 기억이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마는.

 

[흐흐, 흐…]

 

이봐라, 뭐가 봉인되어있는지 나를 보며 실실 웃어대는 이 검은색 형상을 봐라. 나는 괘씸한 느낌이 들어 부엌에 있는 적외선 살균 소독기의 문을 열고 선반을 빼내어, 이 항아리를 쳐넣었다. 다른 물건들에 깃들어있는 것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치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몇몇 들은 몸을 뱀처럼 늘어뜨려 나를 괴롭히려고 안달 난 것 같았지만, 이런 건 초반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나는 문을 닫고 바로 적외선살균소독 on 버튼을 켰다.

 

[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그래. 이 녀석들은 세균이 있으면 더 힘이 강해진다. 정확히 말해서 실제로 독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악령이나 악귀로서 강해지는 거다. 이러면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고 실제로 받는 영향도 있으므로, 한 번씩 알코올 소독을 하거나 적외선 살균 소독을 해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고 나면 악이 서린 것들이 진이 다 빠져서 퇴치하기 쉬워진다. 이게 바로 현대식 퇴치. 나는 문명의 이기를 잘 이용하는 성불 방법이 아주 좋다.

 

나는 악령의 비명을 배경으로 삼아 1층 청소를 시작했다. 저주받은 물건은 자리만 차지하니 좀 있다 살균하게 대충 도로 넣어놓았다. 거실 자리를 뺏길 순 없지. 먼지 더 쌓이지 않고 살균 효과도 있게 커튼도 걷고, 햇빛으로 달궈진 바닥을 뜨겁게 삶은 걸레로 바닥도 닦아야지.

 

[살려!! 살려줘!]

“안 죽어.”

 

직사광선 좀 받았다고 죽으려고 엄살까지 부리는 악령과 요괴들 혼쭐내기는 덤이다. 너네 그걸로 타격 안 받아. 그냥 고양이가 빵 굽듯 노릇노릇 구워지는 것으로 저렇게 버둥거리다니.

 

“아줌마 때는 말이야, 이러고 있으면 부모님이 들어와서 어둠의 자식이라고 욕했어.”

 

투덜거리면서 다른 놈들이 그 모습을 보며 허둥지둥 도망가는 애들을 뒤로하고 박박 청소했다. 뭐 조금 억울하긴 했다. 이 녀석들을 혼쭐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더러운 집 청소하면서 생각 정리하려고 왔으니 삼촌이나 어제 온 학생만 아니었다면 굳이 치울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어제 청소를 하지 못한 안방에 들어갔다. 안방은 최근에 관리했었는지 청소가 아주 오래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거실보다 신경 쓸 곳이 적었고, 그냥 먼지 털고 청소기만 돌리면 되는 정도였다. 할머니가 썼었던 물건들이 보이는 것을 보아 삼촌이 다 청소해 왔나 보다.

 

“음 다 됐다.”

 

이걸로 1층 청소는 완료. 당장 1층은 무난히 쓰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이다. 오래된 집이지만 관리 잘해서 나쁘지 않은 정도로 보인다. 청소를 전부 완료한 1층을 보니 뿌듯해졌다. 어제보다 몸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의욕이 든 난 적외선 살균이 끝난 항아리를 꺼내 살펴보았다. 성불시켜줄까? 악령도 조그매져서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든지 부들거린다. 이정도면 악령도 아니고 직사광선 아래에 놔두면 알아서 성불하겠군. 나는 마지막으로 항아리를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놔두었다.

 

[띵-동]

 

이런 생각으로 슬슬 2층을 올라가려고 하자, 현관문의 오래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어휴, 초인종이랑 문손잡이랑 싹 다 바꾸든가 해야지.

 

“아, 어제 왔던 학생분.”

 

역시 어제와 비슷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휴일 아닌가? 왜 교복을 입고 있지.

 

“네. 미사키라고 해요. 저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오늘은 들어가도 되나요?”

“잠시만이라면 괜찮아요.”

 

다행히도 학생이 오기 전에 1층은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청소가 끝났다.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간식거리는 전혀 없어서… 이후 끼니는 내 먹을거리도 없어서 시내로 나가서 사 와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쓸만한 컵에 어제 끓인 보리차라도 담아 물을 대접했다.

 

“미안해요. 온 지 별로 안돼서 먹을 게 전혀 없네.”

 

멋쩍어 그리 보리차를 내밀자, 여학생은 가정교육을 잘 받았는지 아니라고 한사코 사양하면서 보리차를 받았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인가요?”

“그, 사실 할머님에게 부탁드린 일이 있어서요.”

“제령 관련으로요?”

“네…. 근데 여기 사시는 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저주 항아리 때문인가? 이 집에서 하룻밤 잔 내 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미 하나가 흔한 부유령이 되어서 직사광선을 쬐는 중인데. 힐끔 그녀 뒤편에 있는 항아리를 바라보니 흐물흐물하게 바깥을 바라보는 놈이 보였다.

 

“음, 하룻밤 잔 거라서 잘 모르겠네요. 어제는 잘 잤는데.”

“... 몸이 불편하다던가 그런 건 하나도 없으시고요?”

“왜 그러시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네. 그렇네요.”

 

이 집에 서려 있는 기운이 사람을 해칠 정도인가? 아직 2층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일단 1층에서는 그럴만한 힘을 가진 물건이 없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상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머뭇머뭇하며 말을 꺼냈다.

 

“저, 저… 생전에 할머님이 이때쯤 부탁하라고 하신 일이 있었는데….”

 

할머니, 손녀 안 오면 어찌하시려고 하셨어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을 조심스럽게 수습하며 말했다.

 

“뭔지 몰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해드릴게요.”

“...그…”

 

학생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눈물을 펑 터트리더니,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할머님 저 때문에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왜 그리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달랬다. 어차피 할머니 건강이 안 좋았다는 걸 외삼촌이나 부모님이 알고 있었단 점을 여러모로 말해주었고 정말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이는 진정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부탁드린 일은 없던 거로 할게요. 죄송해요. 집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저희 집으로 붙여주세요.”

 

울먹이며 그런 말을 하는데 내가 뭘 말릴 수가 있으랴. 나는 아이 달래는 어른 입장이 되어 결국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후… 진땀 뺐네.”

 

근데 집에서 나오는 물건? 뭐를 맡긴 건가? 하며 거실에서 햇빛을 받던 항아리를 눈치챘다. 아까 저 항아리를 등지고 앉아서 모르는 것 같았는데, 혹시 저 항아리도 학생 댁 물건인가? 큰일 났다. 멋대로 죽여버렸는데! 재빨리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니, 아직 비실비실하게는 살아있다. 하지만 저주 원혼이라기보다는 이제 부유령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안에 있던 수상한 물건을 전부 꺼내보았다. 오전에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위협했던 저주 원혼들은 나를 보면 덜덜 떨며 비명을 지르며 숨기 바빴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아.”

 

적외선 살균 소독기에 넣었지…. 그때 그 비명을 다 들은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것 같았다. 어디에 쓰일지도 위험한 것을 그대로 돌려줄 순 없지. 상대가 저주사라도 전부 없애고 돌려주는 게 맞을 것 같다. 뭐라고 하면 방치되어서 성불해있었다고 하자. 그 생각에 나는 넣을 수 있는 물건을 족족 적외선 살균 소독기에 넣고 잠시 장을 보기로 했다.

 

근처에 슈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학생이 오면 먹일 푸딩이나 단 디저트류를 샀다. 백화점 디저트를 사서 직접 찾아가는 게 나으려나. 일단 요번 주 안으로 학생이 오지 않으면 달래러 가야 하긴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청소년들은 별것도 아닌 거로 죄책감을 느끼는구나. 하긴 그 나이 때는 호르몬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몸도 건강하니 자꾸 격하게 행동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정이라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

감정이라는 것은 육신이 있어야 그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육신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삿된 것들은 이러한 육신이 없어서 온갖 감정이 흐려지고 최종적으로는 악령이나 악귀가 된다. 자신은 언령과 영혼적 능력으로 그걸 꿰뚫어볼 수 있고, 그들의 원래 감정을 되찾게 해주어 성불을 시켜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도중에 지난 세월의 사람들과 헤어지고는 무감각했다. 아까 아이처럼 울거나 슬픈 일은 그때 딱 한 번이었고, 기쁘거나 하는 감정도 받지 못했다.

 

그럼 자신의 원래 감정은 무엇인가. 이렇게 감정에 무감각해졌으면, 자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은 이제 싫다. 무력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하고, 우울해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질리도록 했고, 그렇게 죽은 듯이 있기 싫단 말이다.

 

“...”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채로 음식을 잔뜩 사 들고 집에 도착했다. 이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갑자기 집을 향해 눈을 부라리게 되었다. 빨리 없애자. 없애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자. 이런 식으로 쳐져 있는 것은 나와 맞지도 않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게 분할 때는 잡념과 생각을 없애며 움직이는 게 무엇보다 낫다. 어제도 차라리 움직이니 기분이 나아지는 걸 증명하지 않았던가.

 

뭘 해야 할지 모르면 드라마에서 나오던 목욕을 끝내고 우유를 마시며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다든가 하자. 그러면 조금 낫겠지. 그리 생각하며 전투적으로 1층에 있는 모든 저주물건을 휘저었다. 이 안에 깃든 원혼들은 내 능력과 함께 살균세척, 알코올 소독으로 인해 한없이 사그라들었고 저 항아리에 가만히 있는 부유령과 비슷해졌다. 빡빡 빨린 빨래처럼 깨끗했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첫날 설치해둔 벌레 약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뜻은 내가 온 이후로 벌레 한 마리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주변에 이렇게 숲이 많은데 안 들어왔다는 것은 좋지 않다. 터 중에 가장 안 좋은 터가 바로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곳이요, 그다음으로 좋지 않은 땅은 생명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다.

 

애초에 터부터 좋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저주를 다 흐물흐물 흰 빨래 한 것처럼 해놓아도 집 안에 서린 저주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은…

 

위층과 터의 합작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했던 거에요 할머니.

 

 

 

나는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던 2층에는 딱 봐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리고 뭐가 나올 듯이 위압감을 풍겼으며, 문은 가장자리부터 새까맣게 탄 듯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문에 달라붙은 건 부적뿐만이 아니었다. 인간 형태로 잘라놓은 종이도 같이 붙어있었는데, 그 부적에는 “미사키”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 인형이 열 개는 넘게 붙어있었는데, 이 많은 종이 인형의 이름은 전부 미사키였다. 하지만 그중 멀쩡한 종이 인형은 별로 있지 않았다. 몇 개는 물 먹은 듯 흐물흐물해져서 이름까지 번져졌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검은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이건 아주 흔한…”저주먹이”다. 특히 저주를 건 당사자 모르게 한시적으로 저주를 막아주는 간단한 방법의 하나다. 다만, 이 방법은 정말 한시적이라서 오래 못 버틴다.

 

[네. 미사키라고 해요. 저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오늘은 들어가도 되나요?]

 

귓속에서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며 뇌 속을 파고들었다. 저주 대상자는 미사키. 2년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지키고 있던 여자아이라고 한다면.

 

“... 이건 살균으론 못하겠는데.”

 

지금까지 해오던 적당한 요령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정도의 위력이면 아이가 죄책감을 가질 만도 하지. 심지어 2층 장지문 너머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1층 거실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을 소리다. 다른 요괴들이 첫날 밤에 내 잠자리 근처에서 속닥거릴 만도 했다. 저 정도면 층간소음이지. 그것도 외할머니가 멋대로 들인 것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온종일 빡빡하게 돌아다니고 일한 덕분에 하루가 길었고 피곤했다. 지금은 해가 지고 사방이 깜깜한 밤 11시다.

 

오늘은 여기서 문에 손대면 안 되겠지. 조심스레 돌아서서 1층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바닥에 미사키라는 종이 인형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들여다보니 억지로 뗀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하, 삼촌이 왜 이 집에서 뛰쳐나간 줄 알겠다. 저주 때문에 반 정도 타들어 간 종이를 억지로 떼다니. 몸을 다치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오고 갈 운들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갔을 것이다. 주변으로 불똥이 튀었을 가능성도 있다.

 

 

내일 아이의 집이라도 찾아서 아이와 다시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빨리 자기 위해 어제 썼던 이부자리를 깨끗이 폈다. 그때쯤일까? 시야에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자가 이부자리 피는 근처에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이 집에 사는 요괴들인가.

 

[아직 처리를 못 한 것 같아 정식으로 부탁드리러 왔소. 나는 가택신.]

“이 집에요?”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부정을 안고 있었다. 그 부정이 모습으로 드러나 있었으니 누가 모르랴. 그는 얼굴이 검은색으로 물들어져 있고 물들지 않은 부분의 경계에는 수많은 한자가 보였다. 이목구비는 검은색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검은색으로 물들어진 부분은 형태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자연신이라면 모를까, 이런 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

 

[2층에 무언가 있는 것을 보았겠지.]

“뭐, 문은 열어보지 않았지만… 느끼긴 했죠.”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이런 터에 가택신이 들어오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숨기면서 말이다.

 

[나도 무슨 말이 나올 줄 아나, 일단 처리를 부탁하고 싶소. 설명은 나중에 하지.]

“알겠어요. 일단 내일부터 알아볼게요.”

[지금 당장.]

“무리에요.”

 

지금 피로에 찌든 몸뚱이로 저런 놈을 퇴치하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 정도로 크면 언령을 써도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령의 효과도 기대해볼 수 없는 저주를 상대하는 건 무리다.

꺼내기만 해도 저주 상대인 미사키 양에게 갈 것 같은데 약화할 수도 없다니. 그렇게 되면 우리 집에 와서 할머니에게 미안해 울었던 미사키 양은 생사가 불분명해진다.

 

[오늘 밤이 넘으면 놈은 퇴치할 수 없어질걸세]

“그렇게 말씀하셔도… 곤란해요. 내보내봤자 바로 미사키양에게 갈 텐데 그걸 쫓아가는 것도 벅차요.”

[그럼 그것만 하면 퇴치가 가능하다는 거군.]

“예?”

 

뭔 소리인지 못 알아먹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바깥으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지금 나가시오. 당장. 2층 장지문은 10분 후 힘을 다하오.]

“뭐라고요?!”

 

집주인은 이제 나니까 저택신은 내 의견을 존중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아까만 해도 2층 장지문은 멀쩡했는데! 못 믿겠다는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2층에서 쿵쿵거리는 진동이 시작되며 점점 이 빈 집안에 울려 퍼졌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던 내가 2층으로 슬쩍 올라가 장지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쿵쿵쿵.

 

집을 구성하는 나무가 크게 떨리고 있다. 저런 것은 처음이다. 순식간에 그를 봉인하고 있던 장지문의 종이 인형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다. 정말로 곧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당장 현관문으로 뛰어나갔다. 지금 내가 잠옷 차림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현관문을 당장 열고 뛰쳐나가다가, 돌아와서 열쇠로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집이 부서지거나 무너진다면 다시 지으면 되지만 미사키 양은 어쩌란 말인가. 저것이 1초라도 더 늦게 나와야 했다.

내가 재빨리 집 밖으로 뛰어나오자,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미사키 양이 근처에서 나를 보고 뛰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와 있어요?!”

 

이건 나도 모르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이 이 시간이 나와도 되는 거야? 지금 거리는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고, 이쪽은 숲이 많은 외진 곳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올 생각을 하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아니, 이 말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가요, 일단 도망쳐요!”

 

나는 아이를 붙잡고 뛰면서 주위를 살폈다. 가장 승산이 있는 곳은 어디지? 바람이 가장 상승하는 곳. 그러면 다가오지 못하게 말릴 수 있을 것이다. 재수 좋으면 승천까지 가능할 터. 그나마 그 기세가 보이는 것은… 저 산이다. 토리이가 보이는 계단 위. 그리고 내가 그곳을 발견하는 동시에 내가 머물렀던 집 근처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혼자서라도 저 신사 토리이 너머로 올라가요.”

“헉, 헉… 혹시 뭔가 보여요?”

“보이니까 이러는 거겠죠! 나한테 왜 자신이 저주가 걸렸고 그걸 할머니가 막아줬다고 바로 말 안 했어요?”

“으읏… 흑.”

 

아이는 내가 다그치자 훌쩍이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사실 못 미더워서…”

“아니 그런 이유였어요!?”

 

아이는 내 타박에 끌려가면서도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집안의 액받이에요.”

“그런 걸 아직도 한단 말이에요?! 지금이 몇 세기야?! ”

 

액받이는 아주 옛날, 집안의 액을 전부 몰아서 막아주는 존재를 말한다. 정확히는, 저주로 집안을 키운 괴물들이 저주의 대가를 집안의 한 아이에게 몰아 주는 것이다. 무덤을 하나 파면 판 사람의 무덤 하나 더 만들 듯이, 상대방이 죽을 저주를 보냈다면 우리 쪽에서도 죽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저주사들 가문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이 내려오는 건가. 이런 취급받는 액받이는 부정 탄다고 보통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으로 비인도적인 처지를 받는, 한 사람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들 자기만족의 따돌림과 존속살해 행위이다.

 

“그런 저를 할머니가 많이 불쌍해하셔서 도와주신 건데…. 그러고 그렇게 조치하고 나니 바로 돌아가셔서….”

“계속 말하지만, 할머니 건강 안 좋아서 쓰러지셔도 할 말 없었어요!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몇인데!”

 

이런 식으로 내가 일일이 반격하다 보니 저 멀리에서 들리던 걸음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미사키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신사 계단 위를 오르기 시작했지만, 계단은 끝없이 높았다.

 

“위로 달려갈 수 있어요?”

“모, 모르겠어요.”

“당장 올라가요! 네발로라도 기어서 올라가요! 빨리!”

 

내가 채근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며 빨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게 통하면 좋겠는데. 나는 계단 위에서 굴러다니던 못 하나를 쥐었다. 놈은 인간보다 더 큰 두 배의 크기로 발을 쿵쿵 내리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곧 내 근처로 온다. 이때 타이밍 맞춰서…!

 

“[뇌제초래雷帝招來]!”

 

‘쾅!’

 

번쩍이며 시야를 점멸시키는 것과 동시에 전기가 찌릿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된 검 없이 때려 박으려면 이렇다니까. 하지만 이쯤이면 몇 분 동안은 못 움직일 것이다. 나는 재빨리 미사키가 오른 신사의 토리이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큰일 났어요! 저 분명 신사를 오르고 있었는데!”

“젠장! 이계통로가 왜!”

 

우리는 신사가 아닌 이계통로로 휩쓸렸다. 이계통로 라고 불리는 이곳은 삿된 것들이 많이 사용하는 길이다. 그들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잇는 하나의 길. 시간이 밤이라서 열릴 법도 하지만, 신사 문 앞에서 여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 어딨나.

 

다행히도 계단 끝에 연결된 이계통로는 뻥 뚫린 들판이 아니라 숲속이었다. 그럼 잠시 눈속임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사키의 손목을 잡고 숲속으로 숨어들며 바람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야 했다.

 

“일단 숨어요!”

 

그나마 두꺼운 나무가 많은 숲이라 다행이다. 미사키를 숨길 수 있으니 이걸로 시간을 더 벌 것이다. 대신에 숲속에 곳곳이 나오는 요괴들이 우리를 공격해왔다.

 

나는 이전 생에 내가 쓰던 무기가 너무 간절했다. 어떻게 썼더라. 내 힘을 정제하여 단검 형태로 휘둘렀던 것 같은데 어떻게 손에 쥐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급급여울령急急如律令”

 

재빨리 주문을 외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쳐냈다. 생각해내야 하는데! 손에 쥔 듯 만 듯한 감촉만이 전해졌다. 형태는 없지만 바람과 물을 같이 헤매던 나의 힘을 어떻게 구체화 시켰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우격다짐으로 주문을 외며 쳐내는 것도 한계였다. 그때였을까. 미사키가 나를 데리고 어느 커다란 나무 뒤에 숨었다. 내가 많이 지쳐 보였나?

 

내 걱정은 자연스레 지금 다가오는 저주에 대해 쏠렸다. 저것을 어떻게 하지. 저 정도로 크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언령은 무리니 역시 죽이는 수밖에 없나? 만일 죽인다면 어떻게 죽이나? 예전에 내가 쓰던 무기로 분명 죽일 수 있을 터이지만, 어떻게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이렇게 초조하게 생각에 잠기자, 멀리서 금속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보여선 안 됩니다.”

“적당히… … …하쇼잉~.”

“하하하, … … … 구나.”

“... …. 아루지……….”

 

 

멀리서 언뜻언뜻한 소리만 들렸다. 나를 가르치는 것 같았는데, 아루지? 우리를 도와주는 건가? 그들은 우리의 일정 거리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덕분에 다가오는 요괴들은 더는 없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니면 아까 집 밖으로 뛰어가라고 했었던 가택신의 도움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했든 간, 이때가 기회다.

바람의 흐름을 다잡으니 가까운 곳에서 적절한 용솟음 형태를 이루는 것을 보았다. 조금 있으면 바람이 하늘로 상승할 것이다. 판단을 마친 나는 미사키를 데리고 그곳으로 뛰었다.

 

[ … …. ….!!!!]

 

형용할 수 없는 외침이 점점 가까워진다. 놈도 이제 이 근처다. 덕분에 이계의 땅이라고 해도 지척이 울려서 서 있기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저주는 이계의 땅을 만나 한없이 요괴를 흡수해 커지고 있었다. 이제 인간의 다섯 배 정도는 될 것이다.

 

실책인가. 주변에서 요괴들이 빨려 들어가듯 합쳐지고 있었다. 다수가 모인 한 명, 한 명의 다수라니. 우리 근처에 와도 올라가지 않고 미사키를 먹을 것이다. 아니, 먹는 것으로 끝나겠나? 옆에 있던 나 또한…

 

커다래진 놈의 손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죽는 걸까? 예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방법을 찾았지만, 필름이 끊긴 듯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내 이런 바람을 느꼈는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은 놈의 몸에 달라붙은 요괴를 조금씩 흩어지게 했다.

 

[더는 싫어….]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목소리에는 몇 번이고 울었는지 훌쩍이는 소리가 숲속에 여러 번 울려 퍼졌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몰랐지만, 서글픈 목소리였다. 내 앞에 억지로 뭉쳐진 요괴들의 울음소리일까? 아니면 저주인가?

흩어져 날아가는 요괴들 사이 저주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아.]

“....”

 

서글픈 울음소리는 몸을 불린 저주의 목소리였다. 심지어 어린아이 목소리로 들렸다.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생전에 어린아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 가장 지독한 저주는 아주 어린 아이를 굶겨 항아리에 들어가게 한 후 밥을 주어 못 나오게 하는 것이었지. 나는 꼼꼼히 다가오는 저주를 살펴보았다. 한자 같은 문자가 실이 되고 목줄이 되어 미사키 쪽으로 점점 뻗어온다. 이것이 저 아이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저주이다.

 

이걸 자르면 저 아이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 존재의 본질 또한 저주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 아이를 포기하고 죽이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살 수 있다.

 

나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필요했다. 단지 그것을 갈구하자, 내 주변 바람은 슬슬 소금의 향기를 담기 시작했다. 아주 익숙한 듯이 내 몸은 그 속으로 손을 넣었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 속에 내가 찾는 것이 있으리라. 그렇게 짧지만 긴 찰나의 시간 동안 바람 속을 헤맸다. 어느 곳은 육해의 바닷속이었으며, 어느 곳은 범람한 강 속이었다. 어느 곳은 솟는 용오름의 물 속이었고, 그중에서는 과거의 내가 서 있는 곳도 있었다. 그곳을 여러 번 손을 휘젓자, 과거의 내가 그곳에서 눈감은 채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금속의 감촉이 내 손가락에 닿았고, 나는 놓칠세라 꽉 쥐고는 눈을 떴다.

 

아주 익숙한 형태의, 허리가 잘록한 제사용 검이 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미사키의 목을 옥죄는 줄을 향해 달려가 그것을 끊었다. 줄은 마치 내가 잘라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절단된 부분부터 먹물이 되어 점점 사라져갔다. 미사키에게 있었던 문자는 전부 사라졌고, 반대편에 아이를 옮아 멘 줄조차 점점 소멸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를 괴롭혔던 힘도 사라지고, 요괴를 끌어들이는 힘도 점차 연기처럼 흩어져 저주에 억지로 달라붙었던 요괴조차 검은 벚꽃잎처럼 휘날렸다.

 

동시에 바람은 내 검과 반응해 강한 바람을 일으키고, 조용히 하늘을 향해 검을 들었다. 저주의 형태를 하고 요괴들이 달라붙었던 커다란 아이의 몸은 이제 바람에 붕 떴다. 흩어지는 검은 벚꽃잎이 아이를 감싸고 듯 조심히 흩어졌다.

 

모든 벚꽃잎이 다 떨어지고, 달이 저편으로 넘어가며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온 것은 인간 형태의 어린 몸이었다. 온몸이 문자로 덮여 까맸지만,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그 아이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꽉 매여있던 천은 한 줌 먹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아이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아해야.”

 

나는 떠 있는 아이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이의 눈은 청량했고,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으나 나를 마주 보며 환히 웃었다. 그리 서글픈 것이 없었다. 인간에게 배제당하고 희생당하며, 끝끝내는 저주로 사역 당하며 사람을 죽였다. 그런 아이는 이제 끝나서 다행이라는 듯 후련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차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시간이 늦었다. 가야지.”

 

더 늦으면 승천할 수 없으리라. 나는 하늘을 향해 든 손에서 칼을 놓았고, 고개를 든 칼은 이윽고 용의 형태가 되어 아이를 감싸며 구름 위로 올라갔다. 구름에서는 커다란 두 손이 나와 아이를 감쌌다. 아시여, 아시여 부디 아이를 인도하소서.

 

 

나는 말 없이 아이의 승천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거였다. 몇 분 전의 과거의 나조차 포기한 아이에게 명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하늘로 인도해주고 싶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리라. 산 것도 산 것이 아니리라.

 

 

승천하는 아이를 보내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미사키는 신사 토리이 안쪽에 서 있었다. 심지어 이계에서 헤맸기 때문에 시간대도 꼬인 듯했다. 두세 시간을 헤맨 것 같았는데 벌써 해가 뜰 시간이다. 이런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뭐라 말해야 할지도 막막하니,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집도, 집안도 멀쩡했다. 어제 2층이 무너질 듯 울린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다만 2층 장지문 정도만 나가 있었고 나가떨어진 장지문은 검은색이 아닌 누리끼리한 색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이정도면 쉽게 수습할 수 있겠는걸.

 

[수고하셨소.]

 

나를 쫓아냈던 가택신은 나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이젠 얼굴도 어제처럼 검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그녀가 내게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가택신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그리 쓰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만이 아닐 터이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야말로 고생했어요.”

 

그녀가 웃는 듯했다.

 

 

미사키는 힘들어서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 나는 거실에 있던 내 잠자리에 조용히 옮겨주었다. 이제 저주를 풀었긴 하지만 독이 목이 닿았다. 한동안은 가리고 다녀야 할 것이다.

 

이계의 통로에서 시간이 어긋난 덕분에 한숨도 못 잤지만, 정신은 멀끔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뇌리에 되새겨지며 몸에 생기가 돌았다. 앞으로는 일 준비와 일로 바빠질 것이다. 또, 앞으로는 사고를 치더라도 일단 행동을 하는 게 좋겠다. 너무 큰 사고만 아니면 이번처럼 어떻게든 수습될 것이다. 좀 더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우울하지 않고, 감정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그것이 나를 ‘산다’라고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이 집에 쌓인 고지서와 우편물을 잔뜩 들여왔다. 이미 외삼촌이 내서 필요 없는 고지서도 있었지만, 우편도 없었던 무지의 편지 또한 있었다. 편지 봉투에는 이리 쓰여 있었다.

 

‘主’

 

숲속에서 나를 향해 아루지라고 부르던 자들이 생각나 조용히 편지를 열었다.

 


 

타타리가미祟り神 사리카 님에게.

 

귀하는 폐사의 사니와로 선발되었습니다.

물론 한국인인 당신에게 일본은 굉장히 낯설고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지 모호하시겠지요. 그래서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시려는지 지켜보았습니다. 흐트럼없이 해결하는 모습은 폐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삿된 것들의 신인 당신이 일본에 온 것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일본의 과거에 당신의 조각이 역사를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당신의 조각을 받아왔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 사실이 거짓일지라도 당신의 힘은 폐사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한바, 이리 우편을 보내드립니다.

 

혼마루에 입장하시려면 아래의 코드를 통해 스마트폰 앱을 설치 후 구동하시고, 벽을 향해 화면을 비추시면 이동하시려는 혼마루로 가는 문이 나타날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이계의 문이니, 이계의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폐사, 시간 정부.

저희 쪽 대롱여우가 마중을 나갈 것입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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